살면서 비판이 필요하지만!

우리 삶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구도 비판과 헤아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비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건설적인 시각을 가질 때 발생합니다. 또한, 건전한 비판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변혁과 발전의 토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건전한 비판보다 잘못된 비판이 더 많고, 그 악영향이 훨씬 큼에 있습니다. 실제로, 잘못된 비판으로 인해, 나는 물론 주변 사람까지, 나아가서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주님은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비판과 헤아림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왕이면 우리는 건설적이고 건전한 비판의 방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비판하려면,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비판해야 합니다. 비판하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마음으로 비판하면 그 결과가 절대로 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아픔을 위로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비판만 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비판의 내용이 옳을 때도 있었지만, 욥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보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욥을 책망하려는 마음이 더 컸기에 관계가 더 나빠졌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비판할 때, 그들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 사랑으로 비판했기에, 오히려 풍성한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비판한다면, 비판하는 태도와 말투조차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껴서 비판하면, 나도 타인도, 교회도 살아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비판이 ‘아니면 말고’ 형태가 아니라, 비판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같을 수 없기에, 매사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판이 서로 달라서 발생하기에, 비판 전, 비판하는 내용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기한다면, 비판은 더 많은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우리 삶에 대안 없는 비판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안 없이, 기분과 상황에 따라 일단 비판하고 보면, 남는 것은 상처와 분쟁, 다툼뿐일 것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옛날에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안과 새로운 지혜를 제시하시며, 유대인의 삶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실제로 대안이 없다면, 오히려 비판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생각할수록, 비판은 유익한 것보다 오히려 유해(有害)함이 더 많습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비판하기 전, 먼저 우리를 이해하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십자가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복음, 부활 복음, 용서와 화해, 생명과 상급을 얻도록, 더 나은 대안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이해하고, 용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 없는 비판, 대안 없는 비판은 모두를 아프게 하지만, 이해와 용납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항상 사랑하고 살리려는 마음을 가진 비판, 대안을 가진 비판으로, 교회가 더욱 든든해지길 소원합니다.